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5 - 수안 계씨~광녕 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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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姓)씨 알아보기 5 - 수안 계씨~광녕 고씨
  • 장강뉴스
  • 승인 2018.12.2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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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한국성씨본존회 위원)

〈16〉 遂安 桂氏(수안 계씨)

始祖 桂碩遜(시조 계석손)

계씨 중주동방분파고증에서 시조 계석손은 평양에 들어와 태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예부 시랑을 역임할 때 왕명으로 고려말 동래하여 수안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봉군지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수안은 황해도에 있으며 고구려 때는 장색현, 통일신라시대 서암군의 속현이었으며 고려조 이후 수안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바 계(桂) 박(朴), 이(李), 피(皮), 추(秋)씨 등이 세거해 온 것이다.

계씨는 시조 계석손의 3형제중 큰 아들 계원우는 선천(宣川)에 계원조는 강화에 계원제는 강동에 각각 터전을 잡았으며 본관은 수안 이외에도 고서에는 금천, 충주, 나주, 해남, 경주, 강릉, 원주, 연안, 초산 등 12본(本)이 있으나 모두 수안계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역사상 효행과 충의가 두드러진 성씨로 알려진 계씨는 계한명, 계창운, 계한명, 계창운, 계영열, 계항대, 계동형, 계택규, 계덕지, 계원길, 계영순, 계도원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또한 계씨는 무과출신의 걸출한 인물이 많은 바 계사일은 광해군 때 강홍립 장군을 따라 좌영장으로 원병출전했다가 순의했으며 그의 아들 계승노는 정묘, 병자양란에 참전하여 군중기무로 무공을 세워 절충장군이 됐고 또 그의 아들 계지교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했을 때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이 되어 3대에 걸쳐 훈장을 쌓았다. 구한말 항일독립 운동가로 가문을 빛낸 계화는 재만독립군 서로군정서에서 맹활약 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도 참가했다.

그는 북만주 일대와 시베리아를 왕래하면서 항일구국 운동에 충혼을 불태웠다. 계연수는 일제의 조선식민화와 민족정신말살정책을 한탄하면서 1920년 묘향산에서 정치, 경제, 문화, 민속 등 민족문화의 기간이 되는 환단고기를 저술하였으나 인쇄비가 없어 출간 못하는 것을 알고서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동지가 출판비를 내어 출간하게 되었는데 계연수는 경신년 1980년이 되거든 공개하라고 하였던 바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수안계씨는 4세손 계빈이 정원도호부사에서 물러난 후 선전에 머물며 세거지가 되었다. 시조 석손공의 장남 계원우는 선천에, 차남 계원조는 강화에, 3남 계원제는 강동에, 4남 계원협은 평양부근에 세거하였다.

3세 계문식의 장남은 선천장파이고 차남 계반은 강경파로 분파되고 6세 계조의 차남이 군현파, 4남 계문영의 장남 계수방이 동면파, 차남 계수옹이 원동파, 9세 계춘국의 장남 계천노가 대목파, 차남 계인노가 봉속파, 3남 계원노가 인동파, 7세 계수분의 장남 계풍악이 봉산파, 6세 계반의 차남이 녹산파로 번영하였으나 평양 부근의 성천파, 은산파, 용강파, 증산파, 영유파, 수안파 등은 번성치 못하였다. 1930년 국세조사 때의 인구조사 분포도를 보면 평북 선천, 정주, 강계, 강동, 강화 등 주로 북한지역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센서스에서 5703명으로 집계되어 있으니 현재 수안계씨의 남한 인구는 8,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 바 타성씨에 비해서 극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에 걸쳐 지도급 인사가 많은 것은 수안계씨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친상담함에 있어 단지(斷指) 효자가 많다는 점이다. 계림항, 계수하는 친상을 당함에 있어 단지를 하였음은 물론 거묘 3년을 한 효자인데 이런 효자가 무려 12명이 넘는다.

▲인구: 서울 2,390, 경기 1,042, 강원 282, 충북 148, 충남 210, 대구 128, 전북 76, 전남 103, 경북 47, 경남 104, 부산 432, 제주 18, 계 4,980명.

 

〈17〉 廣寧 高氏(광녕 고씨)

始祖 高有寶(시조 고유보)

광녕 고씨의 시조는 고유보인데 그는 명나라 사람으로 명·청교체기에 청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불사이군의 충성심으로 인조 초에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평남 상원 지방에 정착하였다. 학자인 고유보는 송나라 진종 때 위국의 충렬무왕인 고경의 후손으로 6대조는 명나라에서 예부시랑을 5대조 고한봉은 한림원의 태학자였다.

광녕고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애국심이 강한 고병은을 들 수 있다. 그는 1909년 안중근의사의 공판이 발표되자 변론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주된 세거지가 이북땅이고 6.25사변 이후에도 대부분의 씨족이 이북에 잔류하고 있어 1985년 인구조사에서도 나와 있지 않다.

▲享祀: 매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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