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 정약용과 조선후기 과학의 발전 ‘기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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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정약용과 조선후기 과학의 발전 ‘기계를 중심으로’
  • 장강뉴스
  • 승인 2018.11.1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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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능주고등학교 1학년)
▲ 김성진 학생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4세대 천자문을 배우고 10세대 자작 시집을 낼 만큼 총명했다. 1777년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83년 진사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정조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된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정조의 총애 아래 규장각초계문신을 거쳐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으면 배다리, 수원화성, 거중기 설계 등 기술 관료의 면모도 보여줬다.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목민관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정조 사후 천주교 사건이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은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이루게 된다. 해배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은 자신의 저작을 총정리한 ‘여유당집’을 완성하고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자택인 여유당 뒷산에 묻혔다. 1910년에 문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목민심서’, 홍역치료에 관한 의학서적으로 당시까지 홍역에 관한 국내외 책들의 오류를 비판하고 새로운 치료 방법을 제시한 ‘마과회통’,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새롭게 ‘기중도설’등의 책들을 집필하였다.

이중 특히 거중기는 정약용이 직접 고안한 기계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이 거중기는 정조때인 1796년에 정약용이 수원 화성을 쌓는 수업을 지휘하면서 성곽을 쌓는데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 때 서양 외 여러 가지 기계에 대해 해설한 책인 ‘기기도설’을 참고로 만들었다.

거중기는 평평한 땅에 기계를 놓고 먼 위쪽에 4개, 아래쪽에 9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들어 올릴 물체를 달아맨 다음 도르래의 양쪽을 잡아당길 수 있는 밧줄을 연결하였다. 이 밧줄을 편하게 잡아당기기 위하여 물레를 설치하고 그 물레를 감아 돌리면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 올려지게 하였다.

거중기에 도르래가 달려있는 부분을 보면 움직도르래가 4개 고정도르래가 4개 결합된 복합도르래이다. 복합도르래를 써 무거운 물체를 쉽게 들거나 옮길 수 있었고 일손을 절약해 공사 시간을 앞당기고 국가의 재정을 4만냥 절약할 수 있었다.

녹로 역시 수원 화성을 건설할 때 거중기와 같이 이용된 도르래를 이용한 기계이다. 무거운 물체를 약 10M의 높이가지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녹로를 보면 밧줄을 당기기 위해 물레를 설치했는데 이는 거중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녹로는 거중기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의 대형크레인과 모양이 비슷하다. 이 녹로는 돌을 전후좌우 사방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녹로가 멀리 있는 돌을 거중기 앞에 끌어다 주면 거중기가 돌을 올려 성을 쌓는 작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녹로는 거중기와 다르게 도르래가 움직도르래와 고정도르래가 결합돼 있는 복합도르래가 아닌 고정도르래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녹로는 힘의 이득을 볼 수는 없지만 고정도르래를 이용해 힘의 방향을 바꾸어 노동을 편하게 해주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정약용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오기 위해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두자고 제안했다. 정약용은 기술의 진보가 인간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다고 믿어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과학기술로는 인조때 정두원이 명에서 가져온 화포(총)와 자명종(시계)등이 있으며 인조때 표류해 온 네델란드인 벨테브레와 효종때 도착한 하멜일행은 장기간 체류하며 서양식 대포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었다.

서양의 수학책을 중국어로 번역한 ‘기하원본’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기하학과 대수학등 서양수학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17세기말 최석정은 ‘구수략’이라는 수학책을 써서 무한대와 무한수의 수학적 개념을 해석하였고 대수·기하 및 삼각과 관련된 실학적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선후기 기술 발전은 농업·의학 분야에 집중되고 교통·통신 그리고 제조업이나 산업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하게 사용됐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뒤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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