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경로사상(敬老思想)의 퇴보적 전승(傳承)
상태바
장강칼럼 - 경로사상(敬老思想)의 퇴보적 전승(傳承)
  • 장강뉴스
  • 승인 2018.09.27 0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일중(성균관 전인)
▲ 최일중

한가위 1주일 앞두고 있다. 5일의 긴 연휴다. 이번 한가위에도 가족끼리 모여 앉아 가정사는 물론 세상사 이야기꽃을 피울 듯 싶다.

이야기의 주제는 무릇 가족 건강과 세상사 평온함일 것이다. 다만 추석 전에는 벌초가 최우선이다. 조상의 묘에 벌초를 하지 않고 추석을 맞이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노인공경 경로사상은 충효, 절의, 협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전통문화이다. 충신은 효자에게 구한다는 봉건사회에서의 전언처럼 충성은 효성의 연장이다.

효성을 힘써 배우면 부부의 애정과 도리, 형제자매간의 우애가 생기게 되며 어른을 섬기는 경로사상은 물론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협동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삼강오룐 중 효 사상을 존중한 사례는 이미 삼국사기에 있다. 고구려 본기 권3 태조대왕66(서기118) 8월에 왕이 유사에게 현량한 효순을 천거하게 하였으며 신라본기 권3 내물왕 20년(서기357) 봄에는 효재로서 그 행실이 유달리 뛰어난 자에게 관직 1급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효성에 대한 장려와 포상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 성종9년(서기990년)에는 왕이 어사를 육도에 보내어 효자절부 남녀 7인 문에 정표하게 하고 요역을 면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는 면출의 특혜와 관직의 제수, 곡물과 기타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고려사 세기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충효 및 절의에 대한 미담 뿐 만 아니라 경로에 대한 기록도 적지 않다. 고구려 태조대왕은 늙은 홀아비 홀어미와 어려서 부모 없는 사람 및 늙어서 자식없는 사람, 즉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인 환과 고독과 늙어서 자활할 수 없는 사람을 위로하고 의식을 주었던 것이다.

백제 비유왕 9년(서기312)에는 왕이 사자로 하여금 백성들의 괴로움을 위로하고 환과 고독한 백성들에게 곡식 3석씩을 하사했으며 신라 내물왕도 각지에 사자를 보내어 환과 고독을 위문하고 곡식 3석씩을 주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이 있는 것이다. 경로위문에 있어서 노인 중에서도 고령자를 우대했다.

고려 명종 25년(서기1195년) 정월에 왕이 수원(水原)의 104세 노구에게 곡식 30석을 하사 했으며 조선 중종 35년(서기1540) 4월에 왕이 122세 노파에게 물품을 하사한 기록도 있다. 지금도 어버이날에 경노잔치를 하고 특히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 포상함은 예부터 전승하는 미풍양속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노인에 대한 차별적 시각에서 경로대상자들을 시간이나 물자를 허비하는 비생산적 활동자라는 뜻에서 잉여인간이라 한다. 이것은 인간의 가치를 존재가치로 보지 않고 이 세상에 어떠한 기여를 했느냐의 효율적 측면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는 극단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을 못하는 노인이나 장애인은 모두 잉여인간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은 잉여인간의 개념인정으로 정당화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인 및 장애인을 잉여인간시하는 것은 대단히 가학적이고 잔인하다. 이 세상에서 버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논리와 인간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여인간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돌아볼 필요는 있다. 그것은 은퇴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일 지루하게 소일함으로써 연명하는 인간이라면 잉여인간은 아닐지라도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노인에 대한 암흑적인 틀을 만들어 놓고 노인을 그 틀에서만 해석하려는 왜곡된 인식을 갖는다.

이와 같은 노인차별은 노년을 잉여의 시간으로 간고함으로써 노인을 남은 시간을 그럭저럭 보내다가 종국에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잉여인간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미풍양속의 하나로서 도시철도 전통차 및 시내버스 좌석에는 경로석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시내버스의 경로석에는 경로 대상자들만이 앉게 되는 지정석이 아닌 것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먼저 앉으면 그만이기에 그 표지는 있으나 마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 또는 직장에서 종일 학업 또는 업무에 몰두하다가 버스의 빈자리에 앉아서 잠깐 쉬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면 장래의 국가동량으로서 믿음직스럽다.

그 자리가 경로석일 경우 그들의 거의가 경로대상자에게 양보한다. 그들 중 일부의 청소년은 경로석에 앉아서 태연하게 휴대전화 놀이 조작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도시철도 전동차의 경로석에 않은 취중장년이 옆자리의 노인에게 “늙은이는 집에서 애(손자,손녀)나 봐주지 무엇 때문에 외출을 해서 앉을 자리를 없애나”라고 면박하는 것을 목도한 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취중이었기는 했으나 분명히 노인을 잉여인간 시 함으로써 경로사상을 경시하는 전통문화의 퇴보적 전승자의 행패일 것이다.

요즈음에는 핵가족이 많아짐으로써 부모와 별거하는 가정에서는 조손간의 애틋한 정을 덜 느끼는 손자 손녀들이 없지 않다. 그간의 정보에 의하면 화재대비 때에 조모를 화재현장에 방치한 채 애완견만 안고 나온 몰염치한 손자가 있었다. 이것은 핵가족 사조로 인하여 경로사상이 퇴보적으로 전승되어 가고 있는 증좌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